금메달 리스트로 된 두 사람
김몽
브라질 리우 올림픽이 한걸음 한걸음 다가오고 있다. 리우 올림픽을 눈앞에 둔 지금 지구촌이 벌써부터 열광에 들떠있다.
그런데 문득 올림픽을 떠올리니 서글프고 안타까운 생각이 갈마드는것은 웬 일일까.
그것은 울림픽 력사에 우리 민족으로서는 영원히 지워버릴수 없는 아프고도 서러운 사실이 있었기 때문이다.
1937년에 독일 베를린에서 제11차 올림픽 이 있었다. 당시 독일은 당장 2차대전을 일으킬 만단의 준비를 마친 상황하에서 세인의 이목을 가리고저 세계평화니 민족평등이니 하는 간판을 내걸고 올림픽을 개최하였다.
그번 경기에서 아시아인으로서는 처음으로 조선인 손기정이 마라톤에서 세계신기록을 깨고 우승의 금메달을 따내 세상을 크게 놀래웠다. 하지만 그의 얼굴에는 기뻐하는 기색이 조금도 없고 침울하였다. 종점을 통과하자 손기정은 슬그머니 자리를 떴고 기자들의 질문에도 응하지 않았다. 조선은 당시 일제의 식민지였기에 손기정은 부득불 일본 일장기가 새겨진 유니폼을 입고 뛰였던것이다. 손기정은 비록 일등을 하였지만 망국노로서 일본을 대표하여 운동에 참가한것이 죄라고 생각했다. 일설에는 손기정이 종점을 통과한 다음 겉에 입었던 일장기가 새겨진 유니품을 벗어버리고 미리 밑에 입었던 태극기가 새겨진 옷을 입고 “대한민국만세”를 불렀다고 한다. 그러나 정말 그렇게 하였는지 아니면 애국심이 강한 우리 민족들이 꾸며낸 사건인지는 딱히는 모른다. 그러나 한가지 분명한것은 올림픽이 끝나고 서울에 돌아온 후인 8월 3일에 당시《동아일보》 편집국장이던 리광수가 손기정을 인터뷰하고 신문에 커다랗게 손기정의 사진을 실었는데 유니품에 새겨져있던 일장기표식을 지워버렸다. 이 사건으로 《동아일보》는 페간되고 리광수는 편집국장에서 해임되였다. 이것이 이른바 일장기사건이다. 그후부터 손기정은 마라톤경기에 한번도 참가하지 않았다. 더는 일본의 얼굴에 분칠을 해주고싶지 않았던것이다. 이렇듯 손기정은 민족심이 강한 애국자였다.
제11차 올림픽에 손기정 외에 또 한명의 조선인 녀자 륙상선수가 참가했는데 아시아인으로서는 처음으로 800메터에서 금메달의 월계관을 따내 세상을 놀라게 했다. 가능하게 많은 사람들이 이 사실을 모르고 있을것이다.
1936년, 금릉녀자대학(金陵女子大學)에 강미려(姜美麗) 라는 평양 출신의 녀대생이 있었다. 그녀는 마라톤선수로 유명했다. 중국 국내의 큰 경기 때마다 우승을 했으나 중국국적이 아니라는 리유로 번마다 수상이 인정되지 않았다. 그래서 김구가 여러모로 노력하였고 학교 측에서도 적극 나섰으나 일이 그냥 꼬이기만 했다. 이 일로 강미려 본인도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이때 강미려에게 눈독을 들이는 한 일본외교관이 있었다. 그 일본외교관이 일본정부로부터 강미려를 쟁취하여 일본국적을 만들어 미구에 독일에서 열리는 제11차 올림픽에 내보내라는 비밀지시를 받았다. 일본외교관이 중국정부 중앙철도국의 국장인 장경립(張競立)에게 강미려를 유인하여 쟁취하라는 임무를 주었다. 장경립은 친일파였다. 마침 장경립의 집이 금릉녀자대학 근처에 있었고 그의 둘째 딸이 금릉녀자대학에서 공부하고 있었다. 장씨 부부는 둘째 딸을 내세워 강미려를 자주 집에 초청하여 맛있는 음식도 해먹이고 선물도 사주면서 은혜를 베푸는척 하였다. 일정한 시간이 흐르자 때가 성숙되였다고 생각한 장경립이 중국에 있으면 전도를 망치게 되고 일본에 가면 앞길이 창창할것이라고 꼬드겼다. 장경립이 달콤한 말로 꼬드기니 강미려의 마음이 동요하기 시작했고 거기다 장씨가 부지런히 쐐기를 박았다.
애국단 단원들로부터 이런 상황을 회보받은 김구는 일본인들의 흉계를 반드시 파탄시켜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아무리 궁리해도 뾰족한 대책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때 김구의 한 측근이 김구를 보고 강미려가 영화황제 김염의 독실한 팬이라고 귀뜀했다. 김구가 김염을 불러 강미려의 마음을 돌려세워달라고 부탁했다.
김염은 당시 촬영 스케쥴이 빽빽했지만 상해로 가지 않고 곧장 강미려를 찾아갔다. 그는 강미려 앞에서 일본인들이 조선반도와 중국땅에서 저지른 침략만행을 낱낱이 성토하고 나서 조선인으로 민족의 기개와 량심을 잃어서는 안된다고 당부하였고 만약 일본국적으로 넘어가 일본을 위해 일하면 매국역적이나 다를바 없다고 단단히 모를 박았다. 강미려는 자기의 우상이였던 김염이 몸소 찾아와서 타이르는지라 그 자리에서는 자못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김염은 자신이 가지고 간 사진에다 싸인까지 해주었고 “나라와 민족에 루를 끼치는 삶을 선택해서는 안된다. 언제 어디서나 백의동포라는것을 절대 잊지말라!”는 쪽지까지 써주고 돌아갔다.
하지만 김염의 수고가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강미려는 허영심과 금전의 유혹을 이겨내지 못하고 학교를 자퇴한 다음 장경립의 집에 얼마간 머물러 있다가 곧장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체육총회에 가입했고 프로선수가 되였다.
강미려는 이름을 안창숙으로 바꾸고 일본국적을 취득했다. 일년 후에 베를린에서 거행된 제11차 올림픽에서 녀자 800메터 금메달을 따내 아시아권 최초의 육상메달리스트로 되였다.
결국 제11차 올림픽에서 조선인이 큰 종목에서 금메달을 두개나 따낸것이다. 그러나 금메달 두개가 모두 일본의 몫으로 되여버렸다. 애국자 손기정의 이름은 오늘까지도 빛을 뿌리고 있다. 하지만 조국을 배반한 강미려의 이름은 력사에 영원히 매몰되고 말았다.
<중국민족>잡지 2016-4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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